혜화동 살인방화 사건은 부유층 연쇄살인의 연장일까

본지 2003.11.18일자 [사건분석] '고급 주택가 노인 피살사건은 동일범에 의한 연쇄 살인일 가능성 크다' 제하의 기사를 통해 지난 신사동, 구기동, 삼성동 살인사건에 대한 동일범 가능성이 제기되자, 경찰은 같은 달 18일 발생된 종로구 혜화동 살인사건을 포함한 일련의 단독주택 노인피살 사건이 모두 동일범에 의한 범죄일 가능성이 높다고 25일 밝히고, 뒤늦은 공조수사에 나서고 있다. 11월 18일 오후 3시경 서울 종로구 혜화동 2층 단독주택 안방에서 불이 나 이 집에 사는 김모(87)씨와 파출부 배모(57,여)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이날 불은 문이 잠겨 밀폐된 1층 안방에서 일어나 방 안 장롱과 TV 등을 태우고 10여분 만에 꺼졌으나, 그 안에 있던 김씨는 머리에 둔기로 얻어맞은 상처가 있는 상태로, 배씨는 불에 그을려 숨진 채 발견됐다. 옆방에서는 김씨의 생후 70일 된 증손자가 이불에 덮인 채 발견됐다. 앞서 발생한 3건의 단독주택 노인살해 사건의 수사가 전혀 진전이 없는 가운데 또 다시 유사한 살인사건이 발생하자, 각 언론사들은 서울판 '살인의 추억'이 발생하는 것 아니냐며 앞다퉈 현장으로 모여들었다. 경찰은 앞서의 사건들과 비슷한 정황과 범행수법에 동일범 가능성을 인정하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계속되는 사건에 대해, 한 경찰 관련 학자는 '돈을 노린 것도 아니고 부유층 노인만을 살해대상으로 삼은 점으로 볼 때, 성장기에 부자노인에 대한 증오나 고통을 경험한 이에 의한 연쇄살인일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또, 경찰 수사팀은 그 동안 한사코 부인해 오던 연쇄살인 가능성을 거론하면서 낮 시간대, 노인, 둔기로 머리를 가격하여 살해, 금품을 훔치지 않았고, 비슷한 모양의 발자국 등 범행정황이 비슷한 점을 들어 동일범의 부유층에 대한 '증오범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한편, 경찰 일각에서는 수법이 점점 대담해지고 정교해 지고 있다며 '연속범죄의 진화'에 대한 우려도 나타내고 있다. - 혜화동 살인사건은 다르다. 경찰은 이전 세 사건의 범행정황과 현장에 남겨진 발자국 모양과 크기가 비슷한 점을 들어 혜화동 살인사건도 동일범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혜화동 사건은 이전의 세 사건과는 몇 가지 점에서 다르다. 우선 첫째, 가장 큰 차이점은 불을 지른 점이다. 신문지를 이용하여 방안에 불을 질렀지만, 10여분만에 자연진화 됐다. 현장 은폐를 위해 불을 지른 점은 분명 이전에 없었던 행동이다. 이 점을 들어 경찰에서는 좀 더 완벽한 범죄를 기도했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이전 사건들에서 범인은 한톨의 증거도 남기지 않아 경찰을 곤혹스럽게 했던 치밀한 성격이다. 만약 지난 범행을 반성하며 좀더 완전한 범죄를 위해 힘들여 사체까지 옮겨다 놓고 지른 불이었다면, 방안 장롱과 TV 일부만을 태우고 자연진화 될 정도로 어설프게 실행하진 않았을 것이다. 둘째는, 2층에 있던 30∼40㎝ 크기의 소형금고를 열려고 시도했던 흔적이 있는 점이다. 경찰은 강도 위장의 흔적일 수 있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단순한 강도 위장을 위해 지하실까지 내려가서 곡괭이와 호미 등을 가져다가 여러종의 연장을 사용해서 수 차례에 걸쳐 금고에 흔적을 남길 필요까지는 없었다. 위장을 위해서라면 가지고 있던 흉기로 대충 긁힌 흔적을 남기고 1층 방을 뒤져 쉽게 찾을 수 있는 현금을 가져가면 될 일이다. 게다가 첫 번째 신사동 사건을 제외하곤 굳이 강도위장을 하려 애쓰지 않았던 범인이 새삼스레 위장을 할 이유도 없다. 셋째는 집주인의 검정색 점퍼를 가져간 점이다. 이전까지 범행 시에는 피가 많이 튀지 않는 방법으로 문제없이 살인을 실행해 왔던 범인이다. 그런데 이번 범행에서는 혈흔을 감추기 위해 점퍼를 가져갔다. 사용한 흉기의 형태가 이전까지와 다르다. 날이 있는 부분이 있어 가격 시에 범인에게도 피가 많이 묻게 되었던 것이다. 또, 피살자들을 제압하는 과정도 다른 사건들처럼 빠르고 순조롭게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씨는 고령으로 거동이 불편했기 때문에 제압이 쉬웠지만 다른 피해자 배씨는 상당한 저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넷째로 간과할 수 없는 일은 생후 70일 된 아기를 살려둔 점이다. 이점은 경찰이 추정하는 범인인 '살인 자체가 목적인 정신적 상처 있는 자'라는 시각에서는 맞지 않는다. 또 '부유층에 대한 증오범죄'의 시각에서라면, 이 아기도 자라면 당연히 유산을 물려받아 부자로 살 확률이 높기 때문에 살려줄 이유가 없다. '굳이 아기까지 죽일 정도로 악하기야 하겠느냐?'라는 질문은, 힘없는 노인들을 주요 대상으로 지금까지 8명을 잔혹하게 살해한 행위로 볼 때 쉽게 납득이 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목격자가 되지는 못할 테니 신경 쓰지 않았다'는 편이 합리적이다. - 혜화동 사건은 단순강도에 의한 모방범죄 혜화동 사건은 흉기의 형태, 살해방법, 범죄현장 행동 등에서 '단독주택 노인 연쇄살인 사건'과 차이가 있다. 범행대상과 범행수법이 비슷하고, 발자국 흔적이 비슷하다고 해서 연쇄살인과 동일사건으로 단정짓는 것은 무리가 있다. 혜화동 사건은 '단독주택 노인 연쇄살인 사건'을 모방하여 금품을 훔치려한 단순강도 사건일 가능성이 높다. 범인은 연쇄살인 사건과 비슷한 대상을 물색하고 대담하게 실행했다. 하지만, 예정에 없던 보일러공의 초인종 소리에 검거가 두려워진 범인은 증거 인멸을 위해 불을 질렀다. 도주 차량이 없어서 열고 싶었던 30∼40㎝ 크기밖에 되지 않는 소형금고도 가져가지 못했다. 결국 미 해결된 사건을 모방했지만 목적달성에는 실패한 강도사건일 가능성이 크다. - 해결되지 않은 강력 사건은 필연적으로 모방범죄를 낳게 된다. 은행강도, 현금 수송차 강·절도, 치밀한 계획의 살인사건, 방화사건, 총기범죄 등 헐리웃 영화에서나 볼 수 있던 강력 사건들이 우리 생활 속에 파고들고 있다. 끔찍한 강력 사건이 늘어가는 것은 불황이나 사회윤리가 흔들리는 탓만은 아니다. 경찰이 범죄발생 원인을 사회문제로 책임을 떠넘기는 것으로만 보여서는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없다. 결국 범인을 검거하지 못하면 모방범죄가 생겨나는 건 어떤 면에서 당연하다. 경찰은 한시바삐 새로운 유형의 지능형 강력범죄에 대처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저작권자 © 시사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