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찾아와서 미안합니다...유족들의 오열과 분노 속에 발굴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28일 오전 11시부터 구로구 오류동 산26-2번지 개웅산 일대에서 실미도 부대원(사형 후 암매장된 4명)에 대한 유해 발굴 작업을 시작했다. 기자가 도착한 10시 40분경 유해발굴단측에서 준비한 분향 상차림 장소가 2기의 가묘(미확인 묘)앞에 준비되자 유족들의 항의가 있었고 이어 진상규명위원회(조사2과장 안정애)은 "미리 설명과 양해를 구하지 못해 미안하다"며 유족들을 이해시킨뒤 "유족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해달라"는 유족들의 뜻에따라 위치를 옮겨 진행 했다. 국방부 진상규명위원회 관계자및 육군 유해발굴단, 유족등 40여명은 발굴작업에 앞서 묵념, 축문 낭독 등 개토제(開土祭)로 고인들을 위로 한뒤 발굴작업에 들어갔다. 개토제에서 일부 유족들은 분노를 감추지 않고 오열하기도 했으며, "하늘나라에서라도 이런 만행을 저지른 자들을 결코 용서하지 말라"며 통곡하는 고인의 여동생도 있었다. 유족회측의 총무인 임영철씨는 "국가가 감언이설로 선량한 젊은이를 사지로 보내 사형시키고, 유족들에게조차 알리지 않은 권력의 중심에 있던 당시의 위정자들은 반성하고 회계해야하며, 과거의 정부나 현재의 정부 모두 대한민국의 국가로 다르지 않으며, 유족들이 두번다시 눈물 흘리는 일이 없도록 정부가 진상규명과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외쳤다.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조사2과)에서는 지난해 11월에 자폭자 20명의 유해를 발굴한 바 있으며, 이번 유해 발굴은 당시 부상을 입고 생존하였다가 재판을 거쳐 사형 집행된 4명(故,임성빈,이서천,김병염,김창구)의 시신을 발굴하는 것이다. 사건 당시 시신 운반 및 매장작업에 참여했던 군 관계자 등의 증언,제보를 종합한 결과, 사형수 4명은 공군제7069부대 보안대가 있던 구로구 오류동 개웅산 지역(7호선 천왕역 부근)인근에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육군유해발굴단(김종성 중령)은 "관련자들의 제보,증언등의 위치가 35년이 흘러 정확하지 않아 확실치 않다. 따라서 4개지점을 추정,선정하여 순차적으로 굴토 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진상규명위원회 조사2과장(안정애)은 유가족과 보도진에게 발굴계획을 설명하고, "국가의 잘못된 행위로 인해 희생당한 무고한 희생자가 없도록 잘못을 바로잡고자 하는 의지가 확고한 만큼 최선을 다 하겠다. 유가족들도 협조해 달라"고 당부하고, "관련자 및 목격자등 결정적인 제보가 절실히 아쉽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실제 발굴 작업은 육군 유해발굴단과 충북대 형질인류학과 발굴팀이 수행하며, DNA 검사는 서울대 법의학교실에서 실시하기로 했다. 발굴된 유해와 유품은 군부대 유해 봉안소(11보급대대)에 봉안 하였다가 DNA 검사 등 법의학적 검사를 마친 후 유족 측과의 합의를 거쳐 처리할 계획이다. ◇실미도 사건◇ 「실미도 사건」은 부대원 모집관들은 '교육수료와 동시에 하사관 또는 소위로 임관시켜 주고 상당액의 특수수당을 지급하겠다'는 등의 조건을 내세워 지원자들을 유인했다. 31명의 부대원 중 7명은 68년부터 70년까지 실미도 탈주 전 훈련과정에서 사망했으며, 나머지 22명은 71년 8월23일 실미도 탈주사건으로 사살(16명)되거나 중상 후 자결(2명), 사형(4명) 등으로 사망했다. 실미도 부대원들은 병적 관리대상자가 아니었고, 체포된 4명도 민간인 신분으로 재판을 받고 사형당했다. 영화로 잘 알려진 실미도부대는 1968년 1.21사태 이후 북한의 특수부대를 능가하는 역량을 양성해 북한을 응징하겠다는 목적으로 박정희 정권 시절 당시 중앙정보부의 지시에 의해 창설됐으며 공군에서 관리한 사실이 확인됐다. 31명의 부대원은 영화에서 특수범으로 그려졌지만, 7명 외에 전과가 전혀 없었고 7명도 가벼운 전과자였다. 탈출 과정에서 숨진 스무명은 유족들에 통보도 없이 벽제 시립묘지에 가매장됐으며, 최근 유해 19구가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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