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에 가려진 여성 수학 천재들

여성과 남성의 지적 기질은 서로 다른 특성을 띠고 있다고들 얘기한다. 그렇다면 정말 수학은, 여성과는 거리가 먼 지적 활동의 영역인 것일까?

사실 수학이 사랑하고 수학을 사랑한 많은 여성 학자들은 망각과 비하의 시간에 묻혀있을 뿐이다. 지나온 역사 속 최초의 여성수학자이자 피타고라스의 아내였던 ‘테아노’와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까지 아름다운 모습으로 등장하는 ‘히파티아’ 등과 같은 여러 많은 여성수학자들이 존재해왔다. 그녀들의 업적과 헌신은 절대 간과할 수 없는 무게감과 가치를 지녔다.

편견을 무너뜨리는 수학적 천재성을 지녔던 그녀들의 존재를 재조명한다. 근대 역사에 영광스럽게 기억될 세계 3대 여성수학자들의 업적과 동시에 그녀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사를 들여다보자


죽은 뒤에야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던 가우스의 조언자 - 소피 제르맹

마리 소피 제르맹(Marie-Sophie Germain, 1776- 1831)은 소피아 코발레프스키와 에미 뇌터보다 일 세기 쯤 앞 시대에 활약한 프랑스의 선배 여성 수학자이자 물리학자다. 우선 그녀는 '수학의 황제'라고도 불리는 가우스와 3년간 편지로 수학에 관한 견해를 주고받으며 가우스의 학설에 큰 영향을 주었던 지인으로 유명하다.

앞선 시대 선배 수학자로서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자신이 여성이라는 것을 드러내면 불리하다고 판단한 제르멩은, 르 블랑(M. LeBlanc)이라는 남성적 가명으로 활동해왔다. 

 가우스와는 다음과 같은 사연으로 인연을 맺게 되었다. 가우스가 처음 “정수론 연구”라는 책을 출판하였을 때 가우스는 ‘르 블랑’이라는 프랑스 사람으로부터 편지를 받았고 그 편지의 내용은 가우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다가 프랑스 군대가 가우스가 사는 마을로 쳐들어오게 되었고 르 블랑은 군대 장관에게 부탁하여 가우스의 신변을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한다. 이 때 가우스는 르 블랑이 제르멩이라는 여성 수학자임을 알게 된다.

이후 두 사람은 아주 친한 학문적 친구가 되었다. 제르멩이 죽은 다음에는 가우스의 노력에 의하여 괴팅겐 대학의 명예박사 학위가 수여된다. 소피 제르맹은 소피 ‘제르맹의 소수’를 정리하였고 ‘소피 제르맹의 정리’를 남겼다. 그녀의 정리는 “정수X,Y,Z에 대해 X5+Y5=Z5이면,X,Y,Z는 모두 5의 배수이다”라는 내용이다.

제르맹의 이 정리는 100년 동안 미제로 남아있던 문제를 완성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완성하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n=5인 경우를 증명하는 데 유용하게 쓰였던 것이다. 또한 그녀가 제출한 ‘제르맹 항등식’은 인수분해 공식의 일종인데, 몇몇 특수한 대수적 문제들(특히 정수론에서)의 기교적 해결에 이용되고 있다.

그녀가 여성이었음이 밝혀지고 이 같은 활약이 계속되면서 그녀는 고대 전설적인 여성수학자의 이름을 딴 ‘19세기의 히파티아’로 까지 불리게 된다. 다시 오늘날 프랑스의 파리에는 그녀를 기리는 ‘소피 제르멩 거리’가 있을 정도로, 국민적 추앙을 받는 여성수학천재로 인식되고 있다.

‘편미분방정식’을 남긴 불굴의 의지와 비극적 사랑의 신화 - 코발레스키

러시아 출신의 천재적인 수학자 소피아 코발레프스키(1850~1891). 편미분방정식에 있어 독보적인 업적을 남긴 수학적 천재였다. 코발레스키는 어려서부터 수학과 과학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으며 11살 때 당대 유명한 수학자의 미적분 강의록을 자신의 방벽에 도배할 정도로 수학에 열정을 보였다.

학문적 열망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대학에 갈 수 없었다. 당시 소련에서는 미혼 여성이 아버지나 남편의 보증 없이 혼자서 여행하는 것도 불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허락을 못 받은 부득불 위장결혼까지 하여 19살에 독일로 간다.

거기서 1년 동안 청강생으로 명강의들을 수강하였다. 그리고 방학 동안에는 런던으로 가 다윈이나 조지 엘리엣 등을 만났다. 하지만 베를린 대학 역시 여학생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는 직접 바이어슈트라스 교수의 집을 방문했다. 그녀를 쫓아버리기 위해 교수는 당시 대학원 학생들에게도 풀기 어려운 수학 문제를 즉석에서 냈다. 그런데 그녀는 모든 문제에 완벽한 답을 제출했다. 해서 그녀는 바이어슈트라스의 개인 학생으로 수업을 받으며 대학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베를린대에서는 박사과정이 허락되지 않아 괴팅겐대 학위논문 심사를 신청하자, 대학은 남성 대상자가 보통 한편의 논문을 제출하는데 비해 그녀에게는 3편의 논문을 제출하도록 요구했다. 이에 그녀는 ‘편미분방정식 이론’, ‘제3종의 아벨적분’, ‘토성의 둘레를 도는 위성의 형태에 관한 라플라스의 연구에 대한 보완’이라는 3편의 논문을 제출한다.

이 논문들의 탁월성에 심히 놀란 심사위원들은 학위 논문의 필수적인 절차인 구두시험을 면제해주며 그녀를 수학 분야에서 최초의 박사학위자로 인정한다.

그러나 역경은 계속되었다. 최고의 학문적 경지에도 독일에서 교수자리를 잡을 수 없었다. 26살, 고국 러시아로 돌아와 자리를 찾았으나 쉽지 않았다. 그녀는 재능과는 관계없는 석유회사에 잡급직으로 취업해 생활하기도 하고 신문사에 기고하는 것으로 생활을 누리며 여성의 고등교육을 위한 초급대학을 만들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이 꿈도 좌절되었다.

상처받은 그녀는 위장 결혼했던 남편의 사업을 도우며 딸을 낳고 기르면서 인고의 나날을 보냈지만 만족을 주지 못했다. 법적인 남편인 코발레프스키는 사업에 실패해 실의에 빠졌고 순탄하지 못한 결혼생활을 비관해 자살로 생애를 마감하였다.

반면에 그녀는 근대 해석학의 아버지라고 불린 독신자 바이에르슈트라스 교수와 사제 관계이자 학문적 동지관계를 이어가면서 정신적 연인으로 알려져 호사가들의 입에 오래 오르내렸다. 소냐는 남편의 자살에 충격을 받았고 남편에게 너무 소홀했던 것을 후회해 한 동안 곡기를 끊었다고 한다.

절망 속에 살아가던 그녀는 러시아 자연과학자 6회 회의에 발표 논문을 제출 해 줄 것을 요청받는다. 6년여를 손을 놓았던 그녀였지만 박사학위 심사 논문으로 제출한 세편의 논문 중 심사위원들조차 잘 이해하지 못했던 아벨의 적분에 대한 독일어 논문을 러시아어로 번역해 제출했다.

그녀의 논문들은 새롭고 경이로운 해석으로 열광적인 평가를 받았다. 하여 1884년 스웨덴의 스톡홀름 대학장으로부터 초빙을 받고 대학 강사가 되었으며 그 해 말 전임교수로 임명됐다. 다음해에는 유럽 최초의 여성 학과장이 되었다.

동시에 그녀는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전문 수학 학술지의 편집인으로 지명되어 자신의 논문들을 자유롭게 출판 할 수 있었다. 1888년에는 38세의 나이로 ‘고정점을 중심으로 한 고체의 회전문제에 관하여’라는 논문으로 프랑스 학술원으로부터 유명한 보르뎅(Prix of Bordin)상을 수상하였다.

학술원은 이 때 평소 지급하던 3천프랑에서 5천 프랑으로 올려진 상금을 받아 그 논문이 수리물리학 분야에 기여한 놀라운 업적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하지만 그녀는 2년 뒤 1891년 감기로 인한 급성폐렴으로 6일간 고생하다 40세의 나이에 급작스럽게 사망하고 만다.

그녀의 박사학위 논문이기도 한 편미분방정식 이론이 현재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은 놀랍다. 물리학의 양자론에서 가장 중요한 방정식인 쉬뢰딩거 방정식과 전기자기학의 핵심인 맥스웰 방정식과 관련한 물리적 현상도 그녀의 방정식을 통해 해석된다.

공학에서 열전달 방정식, 진동을 해석하는 파동방정식 등에도 이용된다. 첨단 반도체 분야에서는 기존의 확산방정식모델에서 나노기술에 적용하기 위한 양자전이방정식 등의 새 편미분방정식 모델도 연구되고 있다.

경제 분야에서 이용되는 블랙-숄즈 방정식(옵션거래 등의 경제 분야에 적용되는 편미분 방정식)도 그 중 하나인데, 머튼과 숄즈는 이 편미분방정식을 만든 공로로 1997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이렇듯 ‘편미분방정식’은 물리학, 공학, 그리고 금융 등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정교하게 모델화하는 수학 이론이 되고 있다.

그녀는 수학 외 문학에도 남다른 재능을 보여 여려 편의 걸작 희곡을 남겼다. 생전에 그녀는 “영혼의 시인이 될 수 없다면 좋은 수학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을 남긴 바 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 일부 남성들은 남성이 여성보다 선천적으로 우수하다는 결과를 증명해내고 싶어서 헬름홀츠(그녀가 독일에서 들었던 물리학 강좌의 교수)와 그녀의 뇌 중량을 측정했다.

그러나, 전체 몸무게 당 뇌의 무게의 비율은 여성인 소피아의 것이 헬름홀츠의 것보다 더 커 망상에 빠져있던 해당 남성 학자들이 할 말을 잃었다고. 러시아에서는 그녀의 업적을 기념하는 우표를 발행하여 소피아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불변량의 문제를 증명한 ‘불변식론’을 완성한 - 에미 뇌터

19세기 수학자 아말리 에미 뇌터(Amalie Emmy Noether, 1882-1935)는 독일 출신의 비극적 일생을 살아간 여성 수학자다. 그녀의 사망 시에 아인슈타인은 "여성의 고등 교육이 시작된 이래, 가장 주목할 만한 창조적인 수학 천재”라는 평을 뉴욕 타임즈에 기고하기도 하였다. 현대 추상 대수학의 창시자인 에미 뇌터, 그녀는 예리한 통찰력으로 우아한 추상수학의 개념을 발전시켰다는 평을 받는 수학자다.

우여곡절 끝에 괴팅겐 대학에서 강의하며 연구하는 중에 나치의 탄압에 견디다 못해 대학에서 쫓겨나 미국에 정학한 지 2년이 채 되지 못해 53세의 나이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독일 바이에른 주 에를랑겐에서 태어난 그녀의 아버지인 막스 뇌터 또한 수학자로 대학의 우수한 교수였고, 수학자 프리츠 뇌터는 그의 남동생이었다. 어린 시절 그녀는 수학 외에도 음악과 춤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에를랑겐-뉘른베르크대학은 여성이 등록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학문에의 열정으로 수업을 청강했다.

결국 1904년, 에를랑겐-뉘른베르크대학이 처음으로 여성의 등록을 허용하자 뇌터는 즉시 수학과 학생으로 등록되었다. 박사학위까지 받은 그녀는 학계의 여성차별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출판물들로 명성을 쌓기 시작한다.

1915년에는 독일의 괴팅겐으로 이사하였지만 여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괴팅겐 대학은 그녀에게 강의하는 것은 허용치 않았다. 동료로서 그녀의 능력을 아깝게 여긴 다비드 힐베르트라는 학자는, 뇌터의 이름 대신 그의 이름으로 된 강의를 뇌터가 맡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고, 강의를 선전해 주는 등 그녀의 처지를 염려해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이 때문에 대학 내 논쟁이 일었다. 이 때 힐베르트 교수는 "교수 후보자의 성별이 그녀의 교수자격을 허가하는데 상관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쨌든 간에, 대학 평의원회는 대학이지, 성별을 구분해 출입시키는 대중목욕탕이 아니다"라고 항변했다. 이러한 환난신고와 멸시 끝에 결국 1919년 그녀는 교수직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이는 봉급이 없는 형식적인 직함이었다.

하지만 뇌터의 차별적 시련은 끊이지 않아, 나치 인종차별법에 의하여 학부 강의를 맡는 것이 금지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3년 그녀는 독일에서 탈출했다.

그러고 미국에서 브린 마르 대학의 교수가 되기 이른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녀는 1935년 죽음을 맞는다. 의사는 그녀가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었고, 그녀는 그대로 수술 중에 혹은 수술 직후에 죽었다. 쓸쓸히 죽음을 맞아 죽어간 뇌터는 브린 마르 대학의 캠퍼스에 위치한 안뜰에 묻혔다. 그

녀의 남동생인 독일 수학자 프리츠 뇌터 또한 비슷한 시기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 소비에트 연방으로 탈출했지만 곧 소비에트 선전 활동을 했다는 죄로 총살당했다.

이 같은 에미 뇌터의 시련 많은 생애는 그 어떤 신화적 여운을 남기는 측면이 있다 하겠다. 그녀의 관심사는 애초 1919년 즈음에는 ‘불변론’이었지만, 환의 아이디얼 이론으로 관심사를 확대하였다. 1921년 발표한 그녀의 아이디얼에 관한 논문은 현대 대수학의 기분이 되었다.

이 논문에서는 서양장기 세계 챔피언인 라스커가 다항식 환에서 아이디얼들이 준소 아이디얼들의 교집합으로 분해된다는 결과를 일반화하여 오름 연쇄 조건을 만족하는 가환 환에도 같은 결과가 성립함을 보이는 것으로 오늘 날의 뇌터 환을 탄생시킨 것이다.

그녀가 연구했던 대칭성과 보존 법칙 사이의 일대일 대응관계를 나타낸 뇌터의 정리는 이론 물리학의 주요한 업적이다. 이에 대해 학자들은 ‘뇌터는 중심 단순 대수학의 이론을 정립하였다’고 는 표현으로 그녀의 공을 높이 사고 있다.

   여기 소개한 세계 3대 수학자로 꼽히는 그녀들은, 오늘 날 여성인권 상황과는 많이 열약했던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을 걸쳐 남성들의 독무대이다시피 한 수학계에 자신의 이름을 남긴 승리자들이다.

많은 시련과 난관 속에서 그러한 실시와 편견에 온 몸으로 맞서 극복하여 기어이 수학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겨 세상에 공헌하고, 세기의 수학자로 이름을 남겼다. 시대 속에서 일정부분 의도적으로 내쳐진 그녀들은 남성 학자들의 그늘에 가려져 있는 여성학자들의 운명들은, 여성과 수학과의 관계를 이원화하며 괴리시켜오던 관습와 젠더 이데올로기의 폭력의 오류를 환기시키고 다시 사유해볼 것을 권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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