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건 "지금의 정치시스템은 고장"…정동영 "지방선거 길목 최대 위기"

고건 전 총리가 또다시 장고(長考)에 들어갔다. 그는 올해 초반까지 만해도 어떤 식으로든 5·31 지방선거에 참여할 생각이었다. 서울시장 등 일부 선거에서 여당 후보를 지원하는 느슨한 형태의 연대도 검토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 전 총리는 12일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과의 만남에서 지방선거 관여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측근들의 말을 종합하면, 고 전 총리의 장고는 지방선거 이후 이른바 '빅뱅'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빅뱅'이란 여당 지방선거 참패→급속한 레임덕→우리당 발(發) 대규모 정계개편의 시나리오를 의미한다. 고 전 총리의 한 지인은 "우리당이 추락하는 상황에서 이해찬 총리 골프까지 터졌다"며 "이런 상황에서 여당 선거에 한 팔을 거드는 것은 일종의 자살행위"라고 진단했다. 고건 전 총리와 정동영 의장이 편치 않은 표정으로 돌아섰다. 다음 약속도 잡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관심 속에 만난 두 사람의 12일 오찬 회동 결과는 '역시나'였다. 두 사람은 13일에는 보란 듯이 '독자행보'를 재촉했다. 고 전 총리와 정 의장 사이에 본격적인 경쟁 관계가 형성되고 있는 양상이다. ◆고건"지금의 정치시스템은 고장" 고 전 총리는 이날 자신의 자문그룹 성격인 〈미래와 경제 포럼〉 창립 토론회에 참석했다. 전날 정동영 의장과의 회동에 관한 질문에 "오늘은 토론회 자리니 토론회에 대한 얘기만을 하겠다"며 입을 닫았다. 고 전 총리는 대신 "지금의 정치 시스템은 고장이 나, 시대의 과제와 국민의 요구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며 현 정권을 포함한 현실 정치 전체를 싸잡아 비판했다. 그는 "현재가 위기 상황이라는 진단에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며 "만연된 사회 분열과 갈등, 경제 침체, 냉소주의가 그 증후군"이라고 말했다. 고 전 총리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이 사회 발전의 큰 기회라고 확신한다"며 "지금의 위기를 잘 극복하면 우리는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고 통합적 리더십이 그 열쇠"라고 자신의 '역할론'을 적극 부각했다. 이날 서울 은행연합회관에서 창림 총회를 갖고 공식 출범한 '미래와 경제'는 국가 비젼과 국가 경쟁력 강화 방안을 모색하고 정책토론의 장(場)을 지향하는 연구모임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특히 고 전 총리가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공식 선언할 경우 '싱크탱크' 역할을 할 것으로 예측돼 관심을 끌고 있다. '미래와 경제'에는 고건 전 총리 이외에 회장으로 선임된 이세중 전 대한변협 회장과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과 최열 환경재단 대표, 박병엽 팬택 대표이사 부회장, 신일순 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박종렬 전 서울남부지검장 등 각계 전문가 152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있다. 미래와 경제는 한 달에 한번씩 정기 토론회와 세미나를 개최해 하는 등 당면한 정책과제에 대한 연구. 개발에 주력한다는 계획이다. ◆정 의장 "지방선거 길목 최대 위기"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은 13일 서울 영등포동 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최근 이 총리와 관련해 당내외에 걱정과 우려가 많이 있었다"면서"5·31 지방선거로 가는 길에서 지금이 최대 위기"라고 진단했다. 김한길 원내대표도"바닥민심은 물론이고 우리당 의원들이 각자의 지역에서 의견을 취합해 최종적인 당의 입장을 정리할 것"이라며"대통령이 귀국하는 대로 보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지난 9일 밤 최고위원들이 취합한 당내외 여론을 갖고 깊은 논의가 있었고, 이를 10일 이 총리와 청와대 주요 인사들에게 전달했다"고 덧붙였다. 이해찬 총리의'3·1절 골프'파문으로 '당 지지도 하락'이라는 파도가 정면에서 몰려오는 상황에서, 지난 12일에는 고건 전 국무총리의 지방선거 연대 거부로 측면 파도를 맞았다. 여기에다 유력한 인천시장 후보로 점찍었던 강동석 전 건설교통부 장관이 끝내 출마를 고사하는 등 '후보난' 너울마저 겹치고 있다. 서울이 지역구인 한 의원은"상대적으로 여당이 강세인 강북에서도 구청장 후보가 나서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며"지방선거를 어떻게 치를지 걱정만 앞선다"고 털어놨다. 열린우리당은 수도권 후보로는 (강금실-진대제-강동석) 카드를 선택한 바 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이 양쪽 카드 모두 짝을 짓는데 실패한 것이다. 고건 전 총리와의 지방선거 연대는 정 의장이 내심 기대했던 반전의 카드였으나 사실상 물 건너갔다. 고 전 총리와의 회동이 알맹이 없이 끝나자 당장 당내에서 정 의장의 리더십이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이런 상황에 놓인 정동영 의장은 이날 최고위원회에서 "저는 이전부터'선자강론'(先自强論)을 주창해 왔다"며"우리 스스로가 먼저 강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개 돌린 고건 전 총리와, '대답없는' 강금실 전 장관 사이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것도 사실이다. 이런 분위기는 열린우리당 의원들 사이에서도 감지되고 있다. 이 총리의 거취 문제와 후임 문제 등에 대해 개별 의견을 쏟아 내거나, 개별 행동을 하는 이들이 사실상 없었다. 정 의장이 '선자강론'을 외쳤지만, 아직 뾰족한 카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정 의장 쪽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강금실 전 장관의 출마 선언 등의 반전 계기가 있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다른 이슈에 밀릴 공산이 크다는 고민도 있다. 무엇보다 정치적 기류가 바뀔 때까지 역전 카드를 아껴야할 상황이라는 것이다. 여당의 한 의원은"정 의장이 한나라당에 반대하는 모든 양심세력 간의 연대를 주장했다면 고 전 총리의 반응이 달라졌을 것"(재야파 초선)이라는 식의 비판이다. 회동 과정에서 고 전 총리로부터 가시 돋친 '훈수'만 들어 고 전 총리의 몸값만 높여줬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 의장은 골프 파문과 고건 연대 불발에 따른 당내 동요를 '선자강론'으로 다잡겠다는 입장이다. 정 의장은 이날 택시운전사들로 구성된 '민심청취단'과 정책간담회를 시작으로 현장정치 행보를 재개했다. ◆지방선거 뒤에 맞춰진 고건의 노림수는? 고건 전 총리와 정동영 의장 두 사람의 '마이웨이'는 예정된 수순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정치권에선 같은 전북 출신의 고 전 총리와 정 의장이 지방선거 전에 손을 잡을 가능성에 가중치를 둔 시각이 드물었다. 양측이 연대할 경우 지방선거에서 이기든 지든, 대권 주자로서 성과와 책임을 함께 나눠야 하는 계산법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고 전 총리가 현실 정치세력 중 가장 덩치가 큰 열린우리당의 제안을 얼버무림 없이 단박에 거부한 것도 모종의 셈법이 작동한 결과로 풀이된다. 대권을 바라보는 그의 입장에선 우리당이 대선까지 지금의 덩치를 유지해내지 못하거나, 적어도 극심한 내부 분열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판단인 셈이다. 이는 '열린우리당의 지방선거 패배'를, 구체적으로는 '정동영 의장의 구심력 상실'을 전제한 계산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지방선거 이후에 꽂힌 고 전 총리의 시선은 여권발(發) 정치권 '빅뱅'의 예고편으로 받아들여진다. 정 의장과의 회동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고 전 총리의 발언은 "중도실용주의 세력의 통합연대"를 강조한 대목이었다. 그는 "제 정당과 정파를 초월해 국가적 차원에서 창조적 실용주의의 가치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폭넓게 협조해야 한다'고 했다. 지방선거 후 정계개편을 당연한 수순으로 내다본 발언으로 풀이된다. 이에 따라 고 전 총리의 '몸값'은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국민중심당이 호남과 충청권에서 얼마나 선전하느냐에 따라, 그리고 여권이 선거 패배 시 총체적으로 맞게 될 분열의 강도에 따라 좌우될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국민중심당의 선전과 여권의 혼란은 고 전 총리에게는 최상의 기회가 되는 셈이다. 다만 지방선거에서 때를 묻히지 않고 과실에 접근하려는 듯 비쳐지는 고 전 총리의 이런 태도는 '무임승차'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정동영 의장이 지방선거를 혼자 힘으로 치러야 하는 부담이 생긴 만큼 고 전 총리도 '지방선거 불개입'에 따라 치러야 할 대가가 반드시 생긴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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