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들은 왜 가시를 세울까?

 

농촌에 산다는 것은 벌레와 곤충 그리고 온갖 새들과의 동거동락이다. 요녀석들이 이제 막 돋아난 꾸찌뽕 떡잎을 꼭 쪼아 먹는 것을 보면 아무리 예쁜 새일지라도 밉다. 그래서 옛 어른들이 씨뿌리기 할 때는 적어도 한 구덕에 세알의 씨를 심으라고 했나보다. 하나는 하늘을 나는 새가먹고, 하나는 땅에 사는 벌레가 먹고 나머지 하나는 내가 먹겠다는 농부의 배려하는 너그러운 마음이 있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

 

그런데 봄이 되자 주작산 여기저기 음()나무와 두릅나무에서 새순이 파랗게 올라왔다. 음나무나 두릅나무의 새순을 따서 데쳐먹으면 입 안을 감도는 향도 독특하려니와 영양도 그만이다. 반가워서 비탈길에 있는 음나무 새순을 끊다가 미끄러지면서 날카로운 가시에 팔뚝이 엄청 찔렸다. 순간 깨달은 것은 어린 꾸찌뽕잎을 쪼아먹는 새와 내가 별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혼자 웃었다. 음나무가 모진 겨울 버티고 봄되어 겨우 새잎을 냈는데 이것을 톡톡 끊어가니 얼마나 미웠겠는가. 도깨비 방망이처럼 엄나무 줄기에는 가시가 돋아있다. 그래서 예전엔 대문 위에 음나무를 달아두어 귀신을 쫓고 액운을 막고자 하였나 보다.

 

두릅나무도 제 몸 가득 가시를 돋우며 자란다. 늦봄, 매혹적인 향기를 발하면서 하얀 꽃을 피우는 아까시나무도 그렇다. 나무들이 달고 있는 가시는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해 에너지를 모아 방어수단을 만든 것이다. 연한 새순을 좋아하는 노루나 고라니 같은 동물들의 성가신 학대로 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무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오래 자란 나무보다 어린 나무일수록 가시는 도드라진다. 어린 나무는 꺾어지고 부러지기가 쉽다. 줄기를 잃으면 자칫 자신의 앞길 전체를 잃을 수도 있으므로 동물들의 접근을 막위해서 가시를 만드는 것이다. 큰 나무가 되서도 가시를 달고 있는 나무도 있지만 어느정도의 공격에도 끄덕없을 만큼 줄기가 성장하면, 나무는 스스로 가시를 떨어뜨린다.

 

사람이나 동물이 두릅나무와 엄나무의 새순을 꺽어 가지 않는다면, 하얀 아카시아꽃을 따가지 않는다면, 나무는 구태여 가시를 세우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도 상처가 많은 사람든 가시가 나 있다. 가시 돋힌 말투, 가시 돋힌 눈빛을 가진다. 세상을 원망하고 분노하는 사람은 좌절과 절망대신 그래도 세상과 맞서 보겠다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다. 열망하되 이룰 수 없는 연약한 자신을 지키려는 무의식적인 가난한 선택이며, 고독하고 응축된 에너지의 표출이다. 가시를 돋우어야만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가지를 세웠을 것이다.

연약한 가시나무 가지가 어느정도 성장하면 스스로 가시를 떨구듯이, 사람 역시 강인해 지면 가시를 떨군다. 그러므로 주변에서 가시가 성장에너지로 바뀔 수 있도록 도와주고 보살펴 주어야 한다는 것이 자연에서 배운 지혜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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