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비스 - <12 Memories>

두번째 앨범 의 믿기 힘들 정도로 대대적인 비평적/상업적 성공과 세번째 앨범 의 처참한 실패 이후, '트래비스'는 분명 변화의 시점이 도래했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더 이상 '라디오헤드', '콜드플레이'의 아류로 불리우기도 지겨웠을 법하고, 전세계에 걸친 불행과 악재, 악의의 총체가 출몰하는 가운데, 홀로 밟고 경쾌한 음악을 추구하는 일에 '부조리함'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그런 '트래비스'의 갈등과 변혁의 욕구 확히 엿보이는 앨범이 바로 그들의 네번째 앨범 <12 Memories>이다. '트래비스'는 확실히 변했다. 다소 음울한 느낌의 기타리프가 인상적인 "Quicksand"로부터 시작되는 <12 Memories>는, 분명 '트래비스'가 자랑하는 캐치한 멜로디와 정확하고 귓가에 뚜렷이 박히는 리듬 등이 그대로 들어있지만, 미드템포로 펼쳐지는 곡진행은 어딘지 음울하고, 심지어 음침하다는 느낌까지 든다. 이어지는 넘버들, "The Beautiful Occupation", "Re-Offender" 등도 같은 특색을 지닌다. 전쟁과 부조리한 인간관계를 묘사하는 냉소적인 가사들이 앨범 전체를 뒤덮고, 들려오는 멜로디는 깊이 침잠되어 머리 속을 떠돈다. '순식간에 귀에 꽂히는' 멜로디가 특색인 '트래비스' 스타일은 앨범의 중반부 트랙들에서 변모해버리는데, 중반부에 수록된 곡들은 대개 멜로디와 리듬을 포착하기 힘든 곡들이고, 몇번이고 되풀이해서 들어야만 곡의 전체구조와 편성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느릿하고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앨범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Love Will Come Through", "Mid-Life Krysis", "Happy Hang Around", "Walking Down the Hill" 등의 곡들은 이른바 '안전용' 트랙들이다. '트래비스'의 고정팬들이 느끼는 당혹감과 실망감을 일정부분 가라앉혀줄 목적으로 들어서있는 이 곡들은 그만큼 '트래비스' 고유의 스타일, 데뷔 앨범 으로부터 시작돼 그들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버린 바로 그 스타일을 유감없이 발휘해 주고 있지만, 앨범 전체의 감흥을 어지르는 데에도 일조를 하고 있어 결국 복잡한 결과를 낳은 파트라 볼 수 있다. 이번 앨범의 최고명곡이라면 단연 중반부에 수록된 "Peace The Fuck Out"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잘 다듬어진 미니멀리즘 튠을 팝의 형식으로 재구성시키는 것이 '트래비스'의 특색 중 하나이겠지만, "Peace The Fuck Out"의 경우, 이런 특색이 가장 완성도있게 드러나있어 듣는 이들을 순식간에 사로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이번 <12 Memories> 앨범을 통해, '트래비스'는 적어도 한 가지 성취, 즉 그들을 괴롭혔던 '아류'라는 치욕에서는 벗어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들이 이번 앨범에서 추구한 음악세계가 그들이 '완벽히' 소화할 수 있는 영역인지에 대해선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많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 '트래비스'가 걸어갈 행보는 과연 어떤 것일까. <12 Memories>를 통해 살짝 맛보여준 '어둡고 냉소적인 세계'를 보강하면서 그들의 고유 색채를 일정부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고유 스타일을 그대로 고집하면서 또다른 음악적 분위기를 덧씌울 것인가. 이번 <12 Memories>가 갖는 의미는 바로 이 '전환점'의 기로에 선 밴드가 보여주는 회색빛 고민의 향취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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